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고궁이란?
고궁을 찾는 이유는 각자 다르겠지만
고궁은 어쩌면 뻑뻑한 도심의 바쁜 일상 속에서
느슨한 쉼표 같은 공간으로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를 부여할 것 없이
마음의 여유로움을 주기 때문일듯~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을 들어서면
지금은 공사 중이지만
정면에 명정문과 명정전이 우리를 맞아준다.
모든 궁궐에는 시냇물이 흐른다.
법전이 있는 궁궐의 안쪽과 외부의 공간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는 물길을 '금천'이라 하고
창경궁의 금천은 옥천이라 불렀으며
이 옥천에 놓인 다리가 바로 '옥천교'이다.
조선시대에 왕이 백성을 만나는 일은
그리 흔치 않은데 '홍화문'에서는 달랐다.
홍화문 앞에서 영조는 균역법에 대한
찬반 여부를 백성에게 직접 물었고
효심 깊은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 씨의
회갑을 기념하여 백성에게
손수 쌀을 나누어 주며 기쁨을 함께했다.
영조 38년(1762)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비극적은 역사를 같이한 나무로 사도세자의
비명을 듣고 너무 가슴이 아파
줄기가 비틀리고 속이 비었다는 회화나무
가을의 끝자락에서 '창경궁' 이야기~
창경궁은 경복궁, 창덕궁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진 조선시대 궁궐로
전각의 수가 많지 않고 규모가 아담하며
창덕궁과 함께 '동궐'로 불렀고
서쪽으로 창덕궁과 맞닿아 있으며
남쪽으로 낮은 언덕을 지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와 이어져
본래 한 영역을 이루었다.
원래는 가을 단풍을 보러 왔지만
단풍 시기 늦게 가는 바람에 해설사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궁궐을 돌아보았다.
국보 제226호 '명정전' 은
임진왜란 후 광해군이 창경궁을 중건할 때 지은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단층 지붕에 아담한 규모이지만
궁궐의 정전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창경궁 외전이 전체적으로 동향한 것과 달리
문정전은 남향하고 있다.
(창경궁을 제외한 모든 왕궁은 남향!)
명정전에서는 66세의 영조가 15세의
정순왕후를 맞이하는 가례 식이 치러진 곳이다.
명정전 앞의 임금님 행차 모습을 상상하면
왼편은 문관 오른편은 무관의 품계석 중간인
'어로'로 등장하시는데~
중간의 이 계단을 어떻게 올라가셨을까
정답은? 가마 타고 올라가셨다^^
모든 정전의 중앙 뒤편에 '日月五峯圖'가 있고
위 천장에는 어김없이 봉황이 그려 있다.
명정전 주위에 왕이 일상 업무를 보던 '문정전'
독서하거나 국사를 논하던 '숭문당'이 있다.
숭문당과 함인정은 명정전의 후 전에 해당하며
영조의 친필 현판이 남아있다.
문정전은 임금이 신하들과 회의를 열고
국가정책의 의견을 나누며 창덕궁의 편전으로
또는 왕실의 혼전으로도 자주 쓰였다.
바로 문정전 앞마당에는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사도세자 뒤주가 있던 애달픈 장소!
'세상이 임금의 어진과 의로움에 흠뻑 젖는다'
건물 이름이 상징하듯
사방이 트인 개방형 건물인 '함인정'은
연회 행사 등 다목적으로 사용했고
임금이 편전으로 썼으며
문무 과거에 급제한 신하를 접견하였다.
'환경전'은 왕과 왕세자의 침전이고
중종과 소현세자가 돌아가신 곳이며
건물 뒤편 북쪽은
여러 대비들의 침전이 밀집해 있었으나
지금은 빈터로 남아있다.
예전에 시청률의 신기원을 이루었던 '대장금'
드라마에서는
주로 궁중 요리 장면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녀는 과연 요리사일까?
짐작컨데 픽션으로 재미를 더한 것이 아닐는지
서장금은 조선 중종대의 어의녀로
왕의 주치의 역할을 하였다고 전해지며
당시 남성 위주의 엄격한 관료 주의제 아래에서
거의 불가능한 일로
뛰어난 의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경춘전'은 정조와 헌종이 태어난 곳이며
어머니 혜경궁 홍 씨가 승하한 곳
왕비의 침전인 '통명전'은 내전의 중심 공간으로
공간이 크며 희빈 장 씨가 통명전 일대에
흉물을 묻어 숙종 비 인현왕후를 저주하였다가
사약을 받은 이야기로 더 유명하다.
통명전을 중심으로 한 내전 영역에는
대비, 세자빈, 후궁들의 처소로 쓰인
여러 전각이 모여있는데
자세히 보면 큰 가구들이 없다.
그 이유는? 자객이 숨을 곳을 없애기 위함!
경춘전은 대비의 일상생활공간인 침전이고
정조와 헌종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창경궁의 정침 즉, 왕의 침전인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 환경전과 함께 남쪽으로 향하였다.
일상생활공간인
내전의 중심 건물답게 넓은 월대를 쌓고
지붕 가운데 용마루가 없다. (보물 818호)
'집복헌'은 순조의 탄생, 돌잔치, 관례 등이
모두 이루어져 순조와 그 인연이 매우 깊다.
내전은 이처럼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왕실의 희로애락이 깃든 이야기를
풍부히 전해준다.
양화당은 원래 대비의 침전이지만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던
인조 임금이 돌아와 거처하기도 하였다.
서울은 아름답고 활기찬 도시이다.
600년 전 조선 왕조는 서울을 수도로 정했고
곧바로 궁궐을 짓고 종묘와 사직을 세웠으며
도성과 성문 등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필요한 시설들을 마련했다.
궁궐은 나라 경영의 중추로 소중한 장소이며
다섯 궁궐과 종묘는 한 나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이고
당대 최고의 규모와 기술로 지어졌다.
'너럭바위'에 움푹 파인 곳이 몇 군데 보이는데
불에 소각되었기 때문에 잔재만 ㅠㅠ
보물 846호 '풍기대'
대 위에 구멍을 뚫어 깃대를 꽂고 그 깃대에
기를 달아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가늠했던
기상 관측 기구이다.
'앙부일구'는 세종 16년에 만들어진 천문이기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사용하던
해시계의 일종으로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면서 생기는
그림자가 이 시각선에
비치는 것을 보고 시간을 알았다.
태실은 왕자의 태반을 묻어 기념한 조형물이고
태실비는 그 사연을 기록한 비석이며
성종 태실, 태반이 보관되어 있다.
태실 바로 옆 늦가을 아니 초겨울 단풍의 자태
창경궁은 창덕궁과 별개의 공간이 아니기에
창덕궁의 후원을 함께 이용하였다.
본래 '춘당지'는 활을 쏘고 과거를 보던
춘당대 앞 너른 터에 자리했던 작은 연못이다.
춘당지에는 백성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왕이 직접 농사를 지던
'내 농포'라는 논 11마지기가 있었다.
하지만 일제가 이를 파헤쳤고 1983년
전통 양식의 연못으로
새롭게 조성한것이 지금의 춘당지!
그 사이에 어느덧 얼음이~ 그래 이제 겨울이다.
올해 인간은 코로나로 고생을 하는데
천연 기념물 원앙들은 그저 평화로운 모습
춘당지 원앙은 주로 수컷이 많아
몇 마리 안 되는 암컷들을 졸졸 쫓아다닌다.
지금 이곳이 원래의 '춘당지'이다.
보물 제1119호 '팔각 칠 층 석탑'
이 탑은 성종 원년 명나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티베트 불교식의 라마탑을 연상케 한다.
창경궁 대온실은 1909년 건축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로
프랑스에서 시공하였고 바로크식이며
외피는 온통 유리로 덮여있고
건축의 뼈대는 목재와 철재로 이루어져 있다.
일제는 창경궁의 전각들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었으며
그 목적은 궁궐의 권위를
격하시키려는데 있었음은 물론이다.
가깝지만 진짜 정이 안 가는 이웃나라 일본!
이제 온실 속의 꽃과 나무를 살펴보자~
차나무과의 '애기 동백나무'
지금 남쪽에는 애기 동백이 활짝 피어있다.
장미과의 '명자나무'
장미과의 '피라칸사스'
차나무과 '산다화'는 11~1월에 붉은 꽃이 피며
동백나무와 달리 씨방에 털이 있다.
마치 새의 부리를 연상케 하는 파초과 '극락조화'
두룹나무과 통영 비진도의 '팔손이 나무'는
제법 족보가 있다. 천연기념물 제63호 후계목
효의 궁궐 창경궁!
왕이 정사를 돌보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성종이 왕실의 웃어른인 세조 비 정후 왕후,
예종 비 안순왕후, 덕종 비 소혜왕후 등
세 분의 대비가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창덕궁 이웃에 마련한 궁궐이기에 '효의 궁궐'
'백송'은 소나무의 한 종류로 하얀 껍질이 특징
어릴 때 푸른빛에서 자라며 하얗게 변한다.
회화나무와 느티나무의 뿌리와 줄기가
뒤엉켜 자라고 있는 모습은
마치 정조와 어머니 혜경궁이
살얼음판과 같은 궁궐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서 있는 모습이 연상된다.
창경궁을 나와 혜화동 쪽으로 가다 보니...
청량리 가는 전차 363호
이 전차는 자동차의 보급이 늘어나면서
전차가 오히려 자동차의 통행에 방해가 된다고
1969년에 모두 사라졌다.
'협궤 기관차'는 증기 기관차로 선로 폭이 좁고
수원~인천, 수원~여주 사이를 운행했다.
1987년에 속도가 느리다는 이유로 운행 중지!
마치 동양화 같은 이 흑백 느낌의 그림자 사진
그냥 찍어보니 참 좋았다^^
언제 어느 때 찾아도 자연의 아름다움과
깊은 역사 전통의 향기를 전해주는 궁궐은
우리가 살아온
또 오래도록 살아갈 터전이기에 자랑스럽다.
초겨울 고궁에서의 뚜벅이 이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