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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역사박물관

popeye 2021. 12. 15. 05:06

드디어 기온이 영하권으로 떨어지는 것이

이제 겨울은 겨울인가 보다.

 

서울을 떠나 객지 생활 30여 년 만에

다시 서울에 살고 있고

그렇기에 서울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려고

지난봄 '서울 역사박물관' 관람 후

후기를 써놓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글이 사라지는 바람에 다시 찾은 박물관

 

먼저 박물관 들어가기 전에 주변 둘러보기

1960년대 대표적 교통수단이었던 전차

'전차 381호'는 약 38년간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운행하다가

1968년 11월 전차 운행을 중단하였다.

 

 도시락을 챙겨가지 않은 아들을 위해

달려온 엄마와 여동생의

애처로운 모습이 인상적이다.

'종루 주춧돌' 종루는 태종 13년(1413)

종로 네거리에 세워졌는데

고종 32년(1895) 이후 보신각이라 불렸고 

이 유물은 조선 전기의 유물로 추정한다.

조선총독부 철거와 경복궁 복원계획으로

 광화문을 원위치에 복원하기 위해

2007년 해체되었던 '콘크리트 광화문'

조선총독부 건축 부재중 장식 기둥과

주두의 일부로 1995년 광복절을 맞아

일제 잔재의 청산과

민족정기 회복 차원에서 철거되었다.

넓은 전시공간과 알차게 꾸민

내부는 볼거리, 배울 거리가 가득하다^^

 

박물관 입장하자마자 왼편에 마련된

기획전시 '다시 일상을 꿈꾸며'

이미 지나간 자료라서 쑥스러움이 ㅠㅠ

역사 속에서 보는

감염병 극복의 희망이라는 테마로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감염병 극복의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천연두와 홍역, 뇌염, 콜레라 등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여러 감염병들을

흑백사진과 옛 기록으로 볼 수 있다.

1층은 평소에 기증 유물전 등 전시가 있는데

더 이상의 계획 전시가 없어 3층으로~

 600년 조선 역사의 서울을 살펴보자

 

왜 서울을 한양으로 결정했을까?

사방에서부터 거리가 일정할 뿐만 아니라

배와 수레가 통한다는

지리적 경제적 이로움이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이유이다.

조선 전기 한양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미적 상상력을 발휘한 작품으로

남경에서 한양으로

그리고 현재의 서울로 연결되는

시간의 흔적을 새겨볼 수 있다.

당시 도성 안에만 10만 명이 넘게 살았고

발굴 유물을 보면 화재와 전란으로 불탄 채

묻힌 기둥, 마룻장, 문짝들과

각종 가재도구들은

옛 청진동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6세기 유물로 추정되는 '판문'

 

두 개의 두꺼운 소나무 판을 잇대어 만든

이 판문은 출토된 모습으로 보아

대문 옆에 나란히 세운 보조 문으로 추정된다.

'한양에서 발견된 무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이

사용했던 무기는 총통으로

승자총통 별조자총통 등의 소형 무기와

현자총통의 무기를 사용하였다.

'도성 삼군 문 분계 지도'

 

삼군 문(훈련도감, 어영청, 수어청)의 

조선시대 수도방위 범위를 표시한 지도

한양의 궁궐은 경복궁 하나였으나

태종이 창덕궁을 지으면서 두 곳이 되었고

현재는 총 다섯 곳이다.

'대형 육조거리' 모형

 

육조거리는 광화문 앞 대로를 지칭하는데

경복궁과 함께 왕도의 상징으로

드라마에서 보던 주상 전하 납시오~

거리라고 생각하면 될 듯^^

'한성부'는 오늘날 서울 특별 시청처럼

한양 시민을 통할하고

도시의 운영 책임을 맡은 행정기관이었다.

지금부터 흥미진진한 마을 이야기를~

도심 속 명승지 '서촌'

 

서촌은 백악산과 인왕산을 배경으로 하는

경복궁 서쪽 지역으로

백운동천, 오류 동천 두 물길을 따라

전개되는 산세는 도성 내 최고의 명승지!

넉넉한 마을 '북촌'

 

뒤로는 백악에서 응봉으로 흘러가는

산자락을 기대고 앞으로는 개천(청계천)을

바라보고 있으며 재산이 넉넉하고

학문적 소양을 두루 갖춘 사람들이 살았다.

지난번에 소개를 잠깐 했던

중인 문화를 꽃피운 '송석원시사'

조선 제일의 번화가 '운종가'

 

오늘날의 종로를 말하는데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으로

공설시장이자

한양의 대표적인 상점가 시전이 있었는데

시전은 왕실과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기능도 하였다.

한양의 동쪽 '동촌과 아랫대'

 

동촌은 창덕궁의 동쪽이자 동대문

안산 자락 일대를 말하며

성균관 일대까지 포함되고

교육 특구와 치외법권 적용이라는

독특한 지역성을 형성하였다.

한강의 내수 '개천'

 

백악산, 인왕산, 남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는 도성의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으로 나가 중랑천과 합류한 후

한강으로 흘러갔다.

이 내수를 개천이라 하였고 지금의 청계천!

전문직의 마을 '중촌'

 

중촌은 청계천과 종로 일대 통역관인 역관,

의사인 의관, 법률가인 율관 등

전문직 관리나 관청에서 근무하거나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살았다.

한양의 기반 '남촌'

 

 목멱산(남산) 아래 청렴한 선비와

명문가도 있고 봉수대와 정자도 많았다.

돛의 색깔이 황톳물로 물들여

누렇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황포돛대'

 

황포돛대는 조선시대 한강을 왕래하면서

상류로는 단양, 제천부터 하류로는

마포에 이르기까지

식량, 땔감, 서금 등을 수송하던 조운선

경강은 전국을 연결하는 뱃길의 중심지로

국가 조세 곡 운송의 종착지로

도매시장이자 중앙시장의 구실을 하였다.

 

도성 밖 '성저십리'의 범위는 동쪽으로는

양주 송계원과 대현까지

서쪽으로는 양화도와 고양 덕수 원까지

남쪽으로는 한강과 노량진까지 속하며

한양이 왕도에서 상업도시로

변모했음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선비가 세속을 유람하면서

마주치는 장면들을 소재로 한 '풍속도병'

어린 꿈나무들이 열심히 역사 공부를~

반월형 석조 연지는 통돌로

안팎을 반월형으로 가공한 1704년 작품

1876년 조선과 일본의 수호 조규 체결 이후

외세는 조선 사회의 변화 방향을

좌우하는 기본 요인이었다.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늘어나고

외국을 여행하고 돌아온 한국인도 생겨

서울은 그렇게 알려졌다.

1897년 고종은 연호를 광무로 정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었다.

 

각국 공사관과 신식학교, 종교시설이 모인

정동은 서울의 새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는데

지명을 선택하면 불이 켜져 금방 알 수 있다.

서양식 건물과 첨단 교통수단이

도시의 모습을 바꿔놓는 한편에서 서울은

신문물의 전시장이었다.

 

그 신문물을 하나씩 감상해보자^^

당시의 종로 모습은 이러했다.

새로운 길 '신작로'가 생기고 호텔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단 '환구단'

'빼앗긴 서울 경성'

 

일본은 한국을 자국 영토에 편입시켜

영구히 지배하는 한편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이용하려 하였고

대한제국 국권을 상징하던 건조물은

대부분 파괴되고 도시 행정과

관리는 일본인의 편익을 우선하였다.

'식민 통치와 남산의 수난'

 

남산 북쪽 기슭인 예장동 일대에는

일본인 거류지와 식민지배의

핵심 통치 기구를 지속적으로 증설하였다.

서울은 일제 강점기 내내 항일 민족운동의

중심지로서 3.1 운동의 첫 봉화를 올렸고

일본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민족의식을 보존하기 위한 운동을 펼쳤다.

당시의 생활상을 들여다보자.

우리는 경성 스타일, 지금은 강남 스타일^^

경성 도시 공간은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불결-청결, 초라함-웅장함, 몰락-번영

음습-활기, 야만-문명'의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 같은 교재였다.

대한제국 선포 후 종로에 새 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전차도 놓았고

옛 원각사 터에 근대적 시민 공원이 생겼다.

2차 대전 당시 경성에도 전쟁의 그늘이~

 

전시의 경성은 굶주린 주민들이 언제 전선에

끌려갈지 모르는 불안에 떨면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는 거대한 수용소였다.

6.25 전쟁 이후의 서울 이야기는 다음에~

 

'꽃잎이 모여 꽃이 되고 나무가 모여 숲이 되고

미소가 모여 웃음이 됩니다.

기쁨이 모여 행복이 되고 두 손 모아 기도가 되며

너와 내가 모여 우리가 되듯이

작은 것이 모여 큰 것이 됩니다.

작은 것에서 큰 행복 찾는 소중한 하루 되셔요'